• 2022. 11. 20.

    by. Jin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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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에 저술한 ‘쾌감원칙의 피안’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있는데 이 두 개의 대립된 본능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 초기에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을 자아 본능과 성능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면서 이 중에서 생리적 본능을 리비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나눈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라고 불렀다. 프로이트는 타나토스를 생물체가 무기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으로 보았다. 이것은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고 처벌하며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공격 본능은 교육이나 경험이 아닌, 인간의 내부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갖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없앨 수가 없다. 따라서 이 공격 본능을 적절하게 합법적으로 배출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 수영, 달리기, 스포츠 등 몸을 힘들게 혹사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것은 공격 본능의 해소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인 생리적행위 또한 고도로 강화된 흥분이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순간에 가장 큰 쾌락을 느낀다. 사랑의 에너지가 강화되고 집중되는 것은 결국 그것이 소멸한 죽음의 상태를 맛보기 위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 기관을 자극으로부터 해방하고 그 속에 있는 자극의 양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쾌락원칙의 작동 경향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의 행동이 이와 같은 반복되는 패턴이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은 불편함을 알아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알아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의 충동 없이 삶의 에너지만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타나토스와 대립하면서도 공존하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인데 이것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생존 본능이다. 에로스는 자아본능과 생리적 본능이라는 두 가지 선천적인 본능을 포함하고 있다. 삶의 본능에서 성격 발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리적 본능이고 이것에 내재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삶의 본능인 에로스는 영원한 결합 방법을 찾음으로써 무자극 상태, 즉 죽음을 지향하는 타나토스와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 즉,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한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게 하는 힘이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탄생, 존재, 사랑, 시작 등을 의미하고 타나토스는 죽음, 무, 파괴, 종말 등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분법적이고 모순된 것들이 모두 우리의 삶에 공존하고 있다. 결국 인간은 에로스에 이끌려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타나토스의 영향을 받아 죽음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가 굳게 결합되어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동전의 양면과 같아 앞면인가 싶으면 뒷면이 되어 앞뒷면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 두 가지는 달라 보이지만 실은 같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00년,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이라는 책에서 “꿈은 무의식 속에 갇혀 있는 또 하나의 자신으로부터 전달된 메시지"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술 중에서 이 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꿈을 통해서 무의식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 과정을 도출할 수 있는 자료로 삼았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무의식을 감지할 수 없다. 무의식은 보통의 상태에서는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는 의식의 힘이 매우 약해진다. 선악의 구별이나 도덕성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약해지므로 이때 나타나는 꿈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무의식의 소원이 현실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이야기화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꿈은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표현하지 않는 것일까. 꿈이라는 완벽한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우리의 의식은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고 있다. 깨어있을 때 비해서 느슨해지지만 잠들어 있을 때도 여전히 의식은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꿈은 도덕과 윤리 의식에 비추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상징과 왜곡을 통해서 표현한다. 내용물의 일부를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혹은 삭제하는 등 욕망의 본 모습을 없애 버리고 상징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꿈에 나타나는 것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소원을 고스란히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가공되거나 변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춤이나 등산, 차량에 깔리는 모습 등은 생리적 행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이런것과 관련하여 이처럼 다양한 상징물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와 개인들의 의식 속에 생리적 본능이 억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건물이 무너지는 꿈을 꾼 여성의 경우, 친구가 죽기를 원하는 욕망은 그녀의 의식 속에 차마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꿈은 그것을 적당히 변형시켜 건물 붕괴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 친구가 다른 사람과 함께 죽는 것으로 재탄생 시켰다. 외부적 원인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는 꿈에서조차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신의 의식을 억압하고 외면하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이처럼 의식화되지 못한 무의식은 심리적 억압에 의해 퇴행 되거나 전이되는 이탈 경로로 움직이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퇴행 되거나 전이된 무의식이 신경증의 발병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의 꿈 해석은 신경증이 발생하게 되는 정신의 작용 원리를 밝히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무의식을 교정하고 치료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인식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의식의 과정에서 무의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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